본문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국가암정보센터

암환자 생활백서

우리들의 희망이야기

[ 자궁경부암 ] 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암환자부문 대상

암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국가암정보센터가 도움이 되어 삶의 희망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6.04
[년도 : 2007] [공모자 : 정점례] [시상내역 : 대상]

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암환자부문 대상


 


 


 


 


암, 사랑으로 이겨낸 우리들의 이야기




저는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던 1952년 뜨거운 여름 전북 고창에서 1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던 해 저희 가족들은 꿈과 희망을 안고 서울로 이주 했습니다. 그 시절은 배고프고 힘은 들었지만 가족이 있고 미래가 있어 나날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나에게 닥칠 액운은 상상하도 못한 채... 설레는 처녀시절은 푸른 꿈을 안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1974년  기차에서 선량하게 생긴 착실한 청년을 만나 75년 약혼에 이어 76년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과의 낭만적인 첫 만남처럼 삶은 온통 장밋빛이었습니다. 1981년, 84년, 88년에 걸쳐 소중한 세 아이의 엄마로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막내가 17개월이 되던 1990년 남편은 어이없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순식간에 저의 행복도 가족도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26개월에 걸친 의사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식물인간 상태로 퇴원을 했고, 저는 그 때부터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가 아닌, 다섯 가족의 보호자이자 가장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시작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고의 원인이 무단횡단이었던 탓에 보상도 변변히 받지 못한 상태로 친지들과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IMF의 강풍은 또 한번 우리 가족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1장에 5원씩 하던 식당 물수건 납품포장 일마저 끊겨 한순간에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우리 가족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막내 딸의 담임선생님께서 도와주셨고 기초 생활 수급자권자 1종에 선정되어 동사무소의 신세도 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이웃들에게 알려져 사방에서 도움의 손길을 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있어 이를 악물고 아이들을 키워나가며 남편을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허리가 숨조차 쉴 수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고통을 참지 못해 병원으로 달려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에 진전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친구로부터 자궁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더럭 겁부터 났습니다.


동네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대학 병원으로 가서 시급히 재검사를 받으라는 했고 병원을 옮겨 검사를 받은 결과 경부암 0기(상피내암)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하던가요. 내가 지금 아파서는 안 될 것인데... 저는 제가 아프다는 사실보다도 가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주치의의 권유로 가장 적절한 치료법이라는 자궁 절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조차도 아이들에게 남편을 맡기기 어려워 식물인간 상태의 남편과 함께 입원을 해야만 했습니다. 남편은 저 이외의 다른 사람이 주는 식사에는 입조차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거동을 못하는 남편의 곁에서 내내 머물러있으면서 그이의 손과 발이 되어 준 사람이 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남편 때문에 정작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받고도 남편이 있는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함께 있어야 했고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치의는  비교적 가벼운 상피내암이라서 각별히 치료를 더 받아야 할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고 자궁을 절제한 터라 자궁암에 대한 걱정은 더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보험공단에서 제공하는 암 검사를 매번 받으면서도 자궁 쪽은 굳이 받지 않았고 검진결과는 늘 정상이었습니다.


폭풍전야 같은 조용한 7년이 흐른 2006년 문득 생리통과 같은 통증을 느끼고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여 확인해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생리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생리할 자궁조차도 없는 저는 또 다시 검사를 받았고 초음파와 조직검사 결과는 깨끗했으나 단층 CT 촬영에서 이상이 발견되었다며 PET-CT라고 하는 양전자 촬영을 권했습니다. 검사비용이 80만원이다 보니 일주일 간을 잠도 이루지 못한 채 고민하는 동안에도 통증은 계속되었고 내내 뒤따르던 불안감에 결국 그 검사를 받았고 일주일 후에 나온 판독 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궁이 없는 제가! 자궁암 4기라니요(췌장과 주변 임파선으로 전이된 상태라고). 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을 정신없이 할퀴어대는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존재였습니다. 남편이 사고를 당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으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걱정을 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남편의 사고 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먼저 떠올랐었지요.


17년! 그 세월동안 저는 남편의 수발을 들어 왔었습니다. 힘든 적도 많았고 괴로울 때도 많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때보다 자랐다고는 하지만 마땅히 사회에 나가서 제 터전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막내는 아직 미성년자인데....


아이들만 이라면 어떻게든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살겠지만 남편의 존재는  막막한 미래의 무거운 말로 다 표현 못할 짐 자체였습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사람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답은 커녕 생각할 시간조차도 제게는 길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몸에 이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정작 병원에서는 이제 손을 쓰기가 힘든 상태이니 식이요법을 하던지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 쪽 병원으로 가서 치료 받으라는 소리마저 하더군요. 병원에서는 포기한 거지요. 내 인생을 여기서 끝내야 하는가. 그런 설움도 복받칠진대, 최소한 남편보다 먼저 갈 수는 없다고 뇌까리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울부짖어 보아도 신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은 포기했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시댁과 친정에 알린 뒤 아이들에게 남편의 간병을 맡기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재검을 받았고 결국 같은 결과가 나왔지만, 항암제와 방사선을 함께 써서 치료를 해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저는 제 힘 닿는 데까지 치료를 받아서 꼭 살아 보겠노라고 다시금 독하게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이 주위 분들을 위해서라도 주저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치료에 저는 금세 지쳐갔습니다. 생각한 것보다도 치료의 모든 과정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되었던지라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만들었습니다.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고 두 번 다시 뜨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약한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남편의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습니다.


‘제발 낫게 해 주십시오. 제발 나아서 남편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마음속으로 수천, 수만 번을 뇌이고 또 빌었던지...


힘들게 1, 2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50일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집에서도 마음 편하게 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치료를 받으러 가면서도 남편 걱정에 마음 편하게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3차까지 치료를 받고 나니 다행히도 결과에 호전이 있어 9차까지 무사히 암과의 투쟁을 계속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9차 항암 치료 후 크게 진전이 없자 ‘탁솔’이라는 항암제로 바꾸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그걸 맞으면서 생지옥을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남아있던 머리카락이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처럼 우수수 빠져버리고 항암제를 맞고 돌아와 며칠이 지나면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가족들이 눈치 챌 새라 저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입술만 물어뜯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와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아왔던 제 남편은 17년간 이승에서의 무거운 굴레를 훨훨 벗어버리고 세상과 모든 사랑했던 것들과 이별을 했답니다. 17년 동안 제가 살아있어야만 했던 이유이자 원동력이었던 남편의 부재로 깊은 허탈감과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앞서서 가버리고만 그 사람을 원망스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남들은 이제 편히 쉬라고 합니다. 하지만 17년간 쌓아온 부부의 말로는 표현 못할 감정을 어찌 남들이 알까요.  그 이를 보내고야 알았습니다. 그 때야 깨달았습니다. 남편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의미였는지... 그 어려운 항암치료를 버티게 했던 단 한사람의 소중한 이...


한 달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쓰던 환자용 침대조차도 버리지 못하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습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남편은 떠나고 없지만 소중한 아이들이 셋씩이나 있었으니까요.


삶과의 고된 전쟁과 병간호로 남들처럼 아이들 공부를 도와준다거나 이렇다할 엄마 노릇도 변변히 못했건만 아이들은 주위 분들의 따뜻한 도움의 손길과 아르바이트며, 장학금으로 어느새 대학4년생, 1년생, 편입준비생으로 힘찬 내일을 준비하며 바르게 성장해 주었습니다. 17년 동안 아이들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속을 썩이는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가 없는 동안에도 제 자리를 지키며 남편 병간호며 집안일과 학업에 충실했고,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며 헌혈도 할 줄 아는 예쁜 아이들입니다-비록 빈혈로 진단받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어미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지만- 너무도 부족한 제겐 보석과도 같은 아이들이지요. 미망인으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낼 수만은 없었습니다.  지금은 가버린 남편의 몫까지 아이들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암치료를 12차까지 마치고 결과를 봐야 하지만 걱정은 될지언정 더 이상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가 이 병을 얻은 뒤로 소소하나마 살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우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 혼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 몸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주위에서 나눠주신 그 많은 사랑들에 제가 보답할 길 아마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제게 그렇게 온기를 나눠주시면서 바란 것은 단 하나, 저의 완치였기에 저는 소중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제 생을 걸어 분발할 것입니다.


식이요법도 하고, 운동도 하고... 사소한 것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안의 의지와 작은 노력들이 언젠가 꼭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그 결실로 인해 아주 조금이라도 저와 같은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하나의 버릇이 생겼습니다. 늘 이번 치료가 마지막이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제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좁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한 조각 햇빛에서조차 생명의 온기와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한 송이 들꽃에게도 존재의 이유를 묻곤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에 자주 빠져들곤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목젖 너머 뜨거운 서러움으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시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살아있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나의 남편과 정신적 지주이신 작은아버님과 소중한 이웃들, 너무도 예쁘고 자랑스럽게 잘 자라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그간 힘겹게 살아가느라 보살피지 못한 게으름을 대신하며 이 글을 바칩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아주 많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보아야 하구요.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의 손자 손녀의 모습도 보아야 하구요. 신세진 분들의 은혜에 보답도 해야 하구요. 투병 중이신 많은 환우들에게 한줄기 작은 촛불로라도 희망의 빛을 밝히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제게는 너무도 절절하고 소중합니다.


저의 두서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누리/CCL
이전,다음 게시물 목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글 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암환자부문 우수상
다음글 재가암환자지원 우수상(최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