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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암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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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희망이야기

[ 뇌종양 ] 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가족부문 대상

암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국가암정보센터가 도움이 되어 삶의 희망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6.04
[년도 : 2007] [공모자 : 박선희] [시상내역 : 대상]

2007년 제1회 "행복한 암환자, 가족 수기공모" 가족부문 대상


 


 


 


 


사랑하는 영혼만이 행복하다


- 정현종의 Love에서-






결혼하고 꼭 일주일이 지나서 신랑 후배의 결혼식에 갔다. 거기 기념촬영을 하던 곳에서 우리 신랑의 가을빛에 밝게 빛나던 머리카락과 환한 웃음을 보면서, 이것만큼은 잊지 말아야지 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짜릿함을 만끽하면서.




며칠 전 출근하는데, 첫 아이가 대문간에서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하는데, 어쩌면 아이아빠와 똑같은 느낌인지... 연하고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한여름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데, 하얀 얼굴에 귀여운 웃음이 만발한다.


“이현아, 이따 저녁에 만나자.” 했더니,


“나는 엄마랑 또 만나고 싶다...” 한다.


여섯 살 첫 아이는 이렇게 아빠랑 똑같다.




살면서 아이아빠에게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만 건강하고 행복하고 우리 가족을 사랑해 주었으면 한 것이었는데, 둘째 아이를 낳을 무렵 속이 안 좋다고 했다. 2년마다 건강검진을 받았고, 때마침 대장내시경 때문에 마셨던 4리터의 물이 너무 많았던 탓에 속이 좋지 않은 거라 여겼다. 그것 때문에 좋지 않았던 속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았고, 기분도 많이 우울해졌다. 그 무렵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경제적 부담 탓인가 싶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것 때문에 우울해 할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사십이라는 나이를 넘어서면서 한번쯤 그런 우울을 겪을 만큼 섬세한 사람이라고까지 여겼다. 오히려 그냥 넘어가는 대한민국 아저씨들보다 우리 신랑이 한편으로는 더 인간적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이상스레 손떨림으로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이렇게까지 나타나나 싶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가끔 손을 잡고 있으면 손이 떨리는 듯도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큰 병이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런데 워낙에 이 사람이 가진 천성과는 너무나 다르게 행동하고 반응했다.


어디를 놀러 가자고 해도 시큰둥하고, 늘 뭔지 모를 걱정만 했다.


하다못해 첫 아이를 태권도 학원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원인이 스트레스라면 좀 놀고 나면 어떨까 해서 해외여행 한번 다녀오자 싶었다. 연가를 내고, 이제 고작 6개월인 둘째아이까지 떼어놓고 첫아이와 조카만 데리고 넷이서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아이들 아빠.


여행을 다녀와도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고, 아무래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건강검진 결과 몸은 아주 건강했으므로...




지난 4월 초 가까운 대학병원 정신과에 갔다. 거기서 잠깐 있는 동안, 손떨림이 찾아왔고, 정신과 선생님이 신경과에 협진을 의뢰했다. 신경과에서는 “경기”인 것 같고, 자세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일주일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다시 결과를 들으러 갔을 때, 신경과 선생님은 나만 불렀다.


나만 부르는데도 아무 이상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정말 사실인지 의심스러웠다.


아이들 아빠가 종양인데, 종양이 아주 크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불과 몇 달 전에 건강검진으로 몸이 아주 건강하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적인 질환이 아닌 다른 병이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뇌종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신경외과에 들러 설명을 들었다.


사진상으로 보면 악성 뇌종양이고 1년 정도 생존할 수 있다고 했다.


아, 점점 모를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 우리 남편의 사진을 보고 말하고 있는 걸까?




급사의 위험이 있어 수술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수술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 무렵 아이들 아빠는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었다. 간질이 더 자주 일어났고, 얼굴은 창백해지고, 식은땀에, 자꾸 잠에 빠져들곤 했다. 종양의 크기가 너무 커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걱정도 하지 못했다. 자기 삶의 끝을 이렇게 의식 없이 맥빠지게 보낼 사람이 아닌데도, 종양이 이 사람의 의식을 자꾸만 지워버리고 있었다.




아이들 아빠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만날 무렵 아이들 아빠는 불교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때마침 소년 소녀 가장돕기 행사를 진행하다 나와 만나게 되었다. 유쾌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우울하기만 했던 나는 남편을 만나 참 많이 밝아졌고 건강해졌다. 어려운 가정형편과 직장생활에서 남편을 만나는 게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우리는 원없이 사랑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고작 6년.


우리는 어린 두 아이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비록 그것은 불행으로 시작했지만, 서서히 우리 삶 속에서 일상이 되었고, 가장 큰 슬픔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 때문에 웃을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적응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거라는 우리의 행복에 대한 본능 때문에 그러하리라.




아이들 아빠는 두 달 반을 병원에서 지냈다. 수술 후 쇼크가 와서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기도 하고, 항암치료제를 먹다가 간수치가 너무 올라가서 항암치료를 중단하기도 했다. 다행히 방사선치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머리 수술이라는 것 자체가 회복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는 거였다.


우리는 생존을 지켜내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한없이 낮아져야 했다. 동시에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사랑해야 할 만큼 삶을 고양시키기도 해야 했다.


 


병원생활 두 달 반 동안 아이들 아빠도 그렇지만 난 거기서 여러 명의 어머니와 아내들을 보았다. 다 키운 아들을 뇌출혈 때문에 1년을 넘게 대소변을 받아냈지만, 의술을 믿었고 아들을 믿었던 어머니는 이제는 잘 걷고 더 없이 유쾌해진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어머니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나는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은 더없이 고마운 삶의 반려였다. 그분의 환한 얼굴과 믿음은 내게도 전염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남편이 아파서 입원했던 또 다른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서른이 넘은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삼십 년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진실한 사랑은 나 자신을 북돋우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아프고 아이들 아빠가 건강했다면, 그는 내게 어떻게 해주었을까? 분명한 것은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진실되게 내게 해주었을 거라는 믿음. 그것 때문에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 더 잘 해주어야 하는데, 아이들 아빠처럼 섬세하고 곰살맞은 구석이 없어서 걱정이다.




두 달 반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우리 넷은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다시금 아이들 웃음과 장난감, 책, 노랫소리와 스케치북으로 채워지고 있다. 한번 놀고 나면 마루가 한가득이 되버려서 발디딜 틈도 없다. 그러나 아이들의 흔적과 그것들을 함께 하는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


넷이서 집 가까이에 있는 논길을 걷곤 한다.


운동 열심히 해야 한다면서 이현아빠는 부지런히 걷고, 나는 둘째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간다. 그러면 첫 아이 이현이는 네 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간다.


아이는 달려가다 소리친다. “엄마, 거미!”




한여름 짙푸른 논과 푸른 하늘, 고추잠자리가 한편의 그림이다.


먹이를 잡으려고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는 모습을 아이들과 우리는 함께 보고 있다. 아이에게 거미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거미에 관련된 비디오를 빌려보자고 이야기한다. 매일 보고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한가한 저녁이 우리에게 주어진 훌륭한 삶이 된다.




아이들 아빠가 머리수술을 한 탓에 예전처럼 우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는 나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수술 후 생길지 모르는 팔다리 마비도 없었고, 말이나 행동이 어눌하고 어색하긴 하지만, 우리들과 충분히 의사소통을 하고 함께 먹고 놀 수 있다. 아이들 아빠가 마비도 없고,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가 된 건, 순전히 아이들 아빠의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우리들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순간순간 두려울 때가 있다. 어두운 차 안에서 그늘진 아이들 아빠의 눈자위와, 방사선 치료 때문에 다 빠져 버렸지만 드문드문 다시 나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아이들 아빠의 병을 애써 부인하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깨울 때가 있다. 아이들 아빠를 내가 먼저 보내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 순간 슬픔을 걷잡을 수 없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함께 산다는 것 말고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으랴.


혼자 가는 그 길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함께 있어주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삶이 끝없는 평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이 함께 실을 잣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배웠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희망으로 매일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소박한 우리의 밥상이 감사하고, 화창한 여름날씨가 감사하다. 


이현아빠, 이현아, 수빈아, 사랑해.




 

공공누리/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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