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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암정보센터

암환자 생활백서

우리들의 희망이야기

[ 유방암 ] 국가암정보센터 우수상(신수미)

암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국가암정보센터가 도움이 되어 삶의 희망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6.04
[년도 : 2006] [공모자 : 신수미] [시상내역 : 대상]

우수상 : 국가암정보센터






나의 위인, 나의 어머니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의 위인은  베토벤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나로서는 신체의 결함과 고통을 이겨낸 음악가인 베토벤이 너무나도 위대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가 나이를 먹어갈 수록 베토벤은 곧 그 자리를 우리 어머니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남편만 믿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산골로 따라 들어 왔던 어머니는 주인을 잃은 농토와 4남매를 책임져야했다. 어머니의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마냥 뛰놀고 싶었던 투정 많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렵게 농사를 짓기를 3년, 어머니는 결국 많지도 않던 아버지의 사고 보험료로 근처 도시에 집을 한 채 마련하셨다. 남의 집 가정부, 식당 종업원 등등 하루 14시간 넘는 힘든 일로 번 돈으로 우리 4남매는 남부끄럽지 않게 자랄 수 있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자랑으로, 낙으로 살아오셨다.


종종 고된 노동으로 많이도 아프셨지만 난 쉬면 더 아프다 는 한 마디로 이틀 이상을 앓으신 적이 없었다. 그랬던 어머니였기 때문에 자궁에 물혹이 생겨 하혈이 있을 때도 한동안 일을 쉬어 몸이 꾀병을 부린다고 넘어가시려고 한 어머니였다.




남들은 폐경이 와야 할 나이에 감자기 생리가 펑펑 쏟아진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병은 자궁 근종이었다. 평생 처음으로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도 작고 초췌해 보였다. 온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어머니를 안정시켜 드리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제거된 어머니의 자궁엔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크기의 근종들이 무수히 붙어 있었고 어머니도 건강을 되찾고 계셨다. 다행이라고, 어머니의 고통도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 어머니로부터 갑작스레 전화가 왔다. 또 수술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집으로 내려올 수 있겠냐고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문제는 호르몬 치료였다. 자궁근종 수술 후 호르몬 관련 치료를 받았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유방암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주 희박한 경우에 아주 작은 암세포가 주입된 호르몬 때문에 커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치료 전 검사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암세포가 급작스레 커진 것이다.


어머니의 오른 쪽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작은 체구였지만 적당히 큰 크기의 가슴을 가지고 계셨고 나 역시 엄마를 닮아 작은 가슴은 아니라고 함께 목욕탕에 가는 날이면 모녀간에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그런 어머니의 한 족 가슴을 잘라 내야한다니, 그 끔찍한 수술을 한차례 더 받아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했다.


암이라는 말은 우리 가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TV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말인 줄만 알았는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리 엄마에게 그러 병이 덜컥 걸려 버렸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집으로 내려가기 전 이틀 동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자취방에 틀어박혀 울고 또 울었다. 엄마 보는 앞에서 울지 않으려면 그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지금껏 고생하면서 살아온 엄마의 인생이 서러웠고, 같은 여자로서 한쪽 가슴을 잃어야 하는 엄마의 지금 심정이 느껴져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자취방에 틀어박혀 어머니의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왜 하필이면 우리 엄마인지, 도대체 내가 그런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란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암이라는 것에 대해 온 세상이 떠들지만 정작 나는 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암에 걸려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없는 살림에 수술비는 되나? 도대체 갑자기 이런 일이 왜 생긴 걸까? 하지만 누구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고 물어 볼 곳도 없었다. 어머니가 조그만 식당을 내고 싶어서 대출을 받기 위해 들었던 보험이 근근히 우리를 빚더미 속에서 구해주고 있었다. 암이라는 것이 이렇게 참담하고 답답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수술 날짜가 정해지고 어머니는 다시 입원해 예전보다 더 조그만 환자가 되었었다. 가족들은 모두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엄마 앞에서는 실없는 농담들을 주고받았다. 어머니도 그런 농담에 대꾸하시며 의연하시려 하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난 의사가 되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했고 병원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우리를 한탄했다.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좋은 대우를 받고 엄마가 덜 아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로 하루에도 수 십, 수 백번 가슴이 아팠다.




이번 수술은 시간이 제법 걸렸다. 가족들과 함께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4시간 가까운 시간들이 너무나 길었다.


드디어 엄마가 회복실로 옮겨졌다는 문구가 대기 화면에 떴다. 모두 회복실로 달려갔더니 엄마는 비몽사몽이었다.


-엄마 나 알아보겠어? 가래를 지금 안 뱉으면 나중에 아프대..힘들더라도 가래 좀 뱉어봐..엄마 나 보여?


연신 팔 다리를 주무르며 엄마에게 말을 걸었고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떻게든 가래를 뱉어보시려고 하셨다.


-못 깨어나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다. 다시는 우리 자식들 얼굴 못 보는 줄 알고...


쾡해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엄마는 그렇게 수술 후 첫마디를 하셨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우리에겐 괜찮다고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겁을 내셨구나란 생각에 도저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와 한참을 울음을 삼켰다. 엄마의 강함과 두려움 모두가 온통 서러웠다.




암과 싸우는 사람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사실 수술은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항암제를 맞고 견디는 과정은 정말 너무나 처절하다. 어머니가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한 여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화장실로 달려 가셔야 했다. 나날이 수척해지는 어머니를 보는 일은 주변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게다가 자꾸만 빠지는 머리카락들….


어머니는 제거된 가슴 쪽 팔을 움직이는데 너무 힘들어하셨다. 어머니를 씻겨드리는 문제는 당연히 하나 밖에 없는 딸인 내 몫이었다. 어머니는 아프시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같이 목욕탕엘 가면 내 등을 밀어 주시곤 했다. 목욕탕 간 본전도 못 뽑는다며 항상 다 큰 딸의 등을 때려가며 등을 밀어 주시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아픈 곳을 피해 몸을 씻겨 드리고 있었다.




항암치료를 받던 중 어머니에게 뭔가 고민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앓았던 병들이 딸에게 유전되기 쉽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자꾸만 내 앞으로 보험을 들기 시작하셨다. 어머니의 답답한 마음을 뭐라 하면서도 나도 내심 불안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설마하는 마음과 비싼 건강검진비가 마음에 걸려 나는 차일피일 그 불안감을 미루고만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우연히 케이블에서 광고를 보게 되었다. 암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조기 검진을 하게 되면 치료비도 보조해 준다고 하는 암 정보센터의 광고였다. 암이라는 말만 들어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된 탓도 있었겠지만 왜 그동안 이런 곳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을까란 자책이 들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어머니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었을텐데, 왜 몰았을까.


사실 TV나 뉴스에서 얘기하는 건강 정보도 과장이나 잘못이 많다는 얘기들, 유전이 되네 마네 하는 애기들로 불안했던 마음들. 암을 조기에 발견 할 수는 없을까, 암환자에게는 어떤 음식이 좋을까, 예방하려면 뭐가 좋을까….


어머니가 아프시고 난 후로 너무나 궁금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설마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까란 마음에 나중에 검사나 한번 받고 말지 뭐하며 불안감만 가졌던 것이었다. 누구에게 물어 본다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홈페이지도 들어가 보고 전화 상담도 하면서 내 자신에게 좀 부끄러웠다.


암에 대해 지레 겁먹었던 부분도 많았고 상당 부분 잘못 알고 있었던 상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모든 불안은 무지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정책이나 기관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거나 활용할 수 있었다면 우리 모녀의 두려움이나 서러움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한다.


요즘도 떨어져 사는 우리 모녀는 전화를 통해 건강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나는 어머니의 재발을 막고 싶은 마음에서이고 어머니는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암에 좋다는 재료를 함께 장을 봐서 음식을 해먹기로 했다.




내가 의사였더라면, 혹은 병원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환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이라면 다 할 것이다.


암에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암 정보센터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할수록 내가 알게 된 이 사이트와 기관이 돈 없고 힘이 없어 불안하기만한 환자들에게 도우미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암 정보센터에서 내가 활용한 것이라고는 정보를 찾아보는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겪은 절망감과 답답함을 느낄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도 가족의 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암센터가 그런 사람들이 잡을 수 있는 따뜻한 손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간절히 바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제 어디서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나의 어머니라고 대답한다. 아버지 없이 자신 한 몸으로 자식 넷을 키웠지만 지금도 절대 자기 욕심을 내보이지 않으신다. 언제나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힘들어 하면 보둠어 주신다. 비록 한쪽 밖에 남지 않은 가슴이지만 어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따뜻하고 어머니의 몸매는 어느 s 라인보다 끝내준다.


어머니는 내 인생 최고의 롤모델, 위인이다.


 

공공누리/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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