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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암정보센터

암환자 생활백서

우리들의 희망이야기

[ 위암 ] 재가암환자관리 우수상(김수선)

암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국가암정보센터가 도움이 되어 삶의 희망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6.04
[년도 : 2006] [공모자 : 김수선] [시상내역 : 대상]

우수상 : 재가 암환자관리






 내가 겪었던 일들을 읽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이글을 써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건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슴을 내가 겪은 시련을 통해서 뼈속 깊이 느꼈슴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짧은지요?


그런데도, 천년 만년 살것처럼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별로 인식하지 않은 채 내게 맡겨진 소중한 생명을 돌보지 않으며 하루 하루를 살아 갑니다. 저 역시도 자신의 건강을 별로 의심해 보지 않았고, 남편이 쓰러지는걸 보면서도 나 자신의 위기의식은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천청벽력과도 같이 떨어진 암 선고는 세상에 홀로 놓여진 외톨이처럼 삶의 희망을 앗아갔었습니다. 그러나 혼자는 아니였습니다.


같이 해 줄 수 있는 이웃이 있더라구요. 현재 우리나라 사회복지제도가 많이 좋아져서 암 투병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암이라는 선고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암이란 존재도 일찍 발견하고 적극적 치료를 하면 치유하여 살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믿게 되기까지의 저의 일들을 간단히 나마 열거해 보려고 합니다.




  8년 전 남편은 중풍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면서 지내는 중 또다시 2003년도에는 신장암방광암을 진단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신장과 방광을 떼어내고 몸 밖으로 소변줄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치료를 미루어 오던 중 소변보기가 어렵고 통증이 심해져 다시 삼성의료원에서 재검사를 받고 신장은 그대로 두고 방광만 레이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니 다시 재발이 되었고, 이번에는 소변을 인공 도뇨관을 꽂고 보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잘 살았지만 중년에 사업실패로 내가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기에 나또한 힘들 때 였습니다. 남편은 또다시 입원 중이었고, 나는 일하면서 남편 간병을 틈틈이 하고 있었습니다. 나 스스로 건강검진 받을 여유가 없었는데, 서초구보건소에서 암 검사를 받으라는 안내장이 왔습니다. 지정병원 오산당 병원으로 가서 네 가지 암 검사를 마치고 위내시경 검사를 하던 중 의사선생님께서 보호자를 찾으셨습니다.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저에게 직접 얘기해 달라고 말씀을 드리니, 의사 선생님께서 머뭇거리시더니 내게 너무나 믿기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위암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간절히 부정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아니라고....


저는 결국 다시 삼성의료원을 찾게 되었고, 거기서 시행한 재검사 결과도 역시나 똑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도 없었고,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수술 날을 예약했고, 날짜는 3월 말이었습니다. 수술 하는 날 목사님께서 직접 병원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대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나마 일찍 병을 발견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고, 위암2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항암치료는 받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퇴원을 했습니다. 집에 와서 병든 남편과 한집에서 생활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내가 항암치료도 시작하기 전 남편은 또다시 방광복수을 하였고, 시집간 딸이 부모를 번갈아 가며 병원을 오가는 게 일과처럼 되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지난 4월 25일 나는 항암치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주사 하루, 약물 2주, 위절제로 인한 적은 량의 식사, 약물치료로 인하여 가슴도 답답하고, 오심구토, 심한 변비가 생겼습니다. 일주일 동안 응급실로 두 번이나 갔다 왔다하면서, 남편과 나는 119번을 몇 번이나 불러야 했습니다. 그 분들께도 미안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한 새벽에 손수 차를 몰고 응급실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려는 바램이 커져 갔습니다.


‘죽고 싶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살아야지...’ 하는 일념으로 힘이 있는 한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보에 우리부부가 치유기도에 올려져있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습니다. 항암제을 먹고 산책길로 나서면 초라한 내 모습, 망가진 내 모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러나, 걸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힘이 들지만,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무더운 여름동안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이젠 병나기 전 생활로 돌아가면서, 남편도 정기검사를 받아보니 신장은 더 악화되지 않고 방광은 개복수술 때문에 정상소변을 볼 수 있으며, 가벼운 중풍이라 불편함은 있지만 생활 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자꾸 남편이 미워질 때가 많았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던 남편에게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이제는 미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라고 주신 새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새 삶을 보람되게 살려고 합니다.




  나는 나를 치유해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특히, 집에 찾아오셔서 간호해 주신 oo구보건소 가정간호사님께 더욱 감사드리며, 지금은 음악교실도 다니고 이웃모임에 나가면서 가진 것은 없지만 현재생활에 감사하며 지냅니다. 돌아보면, 건강검진 받으라고 날라 왔던 종이 한 장의 기회가 얼마나 감사했던 것인지, 여러모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슴을 새삼 느낍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 혼자가 아님을 얘기해 주신 여러분들의 도움을 소중이 간직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지금도 홀로 투병하시는 많은 암환자들이 있슴을 압니다. 원망했던 시간들이 있다면, 가감히 접으시고, 오늘 우리가 살아있슴에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암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서없는 얘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누리/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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