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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암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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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희망이야기

[ 유방암 ] 국가암조기검진 우수상(최현숙)

암으로 힘들어하던 이들에게 국가암정보센터가 도움이 되어 삶의 희망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6.04
[년도 : 2006] [공모자 : 최현숙] [시상내역 : 대상]

우수상 : 국가암조기검진








 2005년 8월6일 암 선고를 받았다. 좌측유방악성종양 3기. 내 병명이었다.


조직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면서도 절대 암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이미 겨드랑이 림프절에 3개의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라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보다 더 엄청난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암에 걸려 당장 죽는다는 소리보다 더 내 가슴을 억누르는 건 치료비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느 해 겨울 무심코 만져본 왼쪽가슴에 작은 멍울둘이 무수히 잡혔었다. 급히 동네 방사선과를 찾아 갔고 의사는 섬유선종이라고 했다. 커지는지 좀 더 주고보자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그 뒤 2년 동안 병원 한번 찾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안정된 곳에서 일하기 위해 중소기업체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저축해 놓은 돈은 없었지만 지금부터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저축하며 살리라 스스로 위로했다.


회사에 입사한지 1년이 넘은 2005년 7월 건강보험공단에서 무료 암 검진표가 날라 왔다. 일주일의 하기휴가를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 문을 열었다. 그런데 초음파를 하는 의사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예전보다 많이 변형이 된 상태며 농양도 보인 다고했다. 조직검사를 권했고 그제 서야 대학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설마, 설마….암은 아니겠지. 집으로 돌아온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방암에 대해 인터넷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온라인 상담도 했다. 내가 암에 걸릴 만한 이유나 증세가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후 조직검사 결과는 내 가슴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다. 종괴(11센티)가 너무 커서 수술을 바로 할 수 없다고 한다. 3회의 항암치료 후 종괴의 크기를 줄여서 수술을 한다고 했다. 암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는 왜 그래야하는지 항암치료가 구체적으로 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너무나 무섭고 외로웠다. 그동안 먹고 사느라 건강검진 한번 받지 못하고 내 몸을 소홀히 한 댓가치고는 너무 엄청났다. 이제 겨우 빚 다 갚고 홀가분해졌는데 암이라니….자나 깨나 치료비 걱정을 하는 내게 주변에 아는 분이 국가암정보센터에 방문해 볼 것을 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가암정보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곳에 암 치료비 지원이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연간 300만원지원 이라고 되어있었다. 눈물이 났다. 나같이 어려워서 치료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아직은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가까운 보건소 암 관리 담당자를 찾아가 등록을 했다. 그리고 국가 암정보센터를 통해서 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나갔다.


 1차 항암치료 후 내 머리카락은 걷잡을 수 없이 빠졌다. 숱 많고 윤기 나던 내 머리카락…. 한번 빠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만해도 한 움큼씩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훤하게 되어버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항암치료 할 때마다 남편과 동행하는 다른 환우들 속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그것은 내게 사치일 뿐 치료비 걱정 안하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 여겼다.


 맞을 때 한번 따끔하고 마는 일반주사와 달리 항암주사는 두고두고 사람을 괴롭혔다. 백혈구 수치가 2900으로 떨어져 치료를 일주일 미룰 때 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백혈구 수치를 올릴 수 있는지 백혈구가 도대체 뭔지 알지 못할 때였다. 암환자는 잘 먹어야 한다는 게 모든 이의 상식인지 주위 친구나 회사동료들이 수시로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곤 했다.


지금도 그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2005년 10월 28일 오전 9시 드디어 수술실로 들어갔다. 난 대학병원을 가지 않고 치료비가 조금이라도 덜 드는 개인병원을 선택했다. 마취에서 깬 나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이 일주일간 병간호를 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호사였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깊은 상실감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남편이 없는 썰렁한 집에서 불면증과 식욕부진 음식에 대한 매혹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삶에 대한 의욕마저 없어져 가고 있었다.


 2주후부터 6개월간의 항암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참기 힘든 고통이 따랐고 난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는 연습과도 같았던 항암치료의 부작용과 그 깊이모를 외로움 속에서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져갔다. 비만 오면 눈물이 났다. 외로워서 나 자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되었고 그 후 보건소 암 관리 담당자의 전화와 방문을 받았다. 새삼 세상이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간호사가 인주유방(실리콘)을 해야 한다고 했다. 비용이 엄청났다. 고민하고 있던 터에 보건소 암 관리 담당자가 나에게 물어왔다. 브라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00시 보건소에서 실리콘과 브라 한 개를 해주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를 반복해서 외쳤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을까. 나는 반드시 건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5월 중순 12회 (6세트)의 항암치료가 드디어 끝이 나고 방사선 33회의 치료를 모두 마쳤다. 병원치료를 모두 마친 셈이었다. 10개월이 걸렸다. 홀가분하기 보다는 두려웠다. 지금부터 모든 관리를 나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게….


인터넷으로 유방암환우 모임에 가입을 했다. 한 달에 한번 정모도 있었다.


동변상련이라 했던가. 그들을 오프라인에서 직접만나니 오랫동안 못 만난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흐뭇했다. 어떤 얘기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고 허물이 없었다. 그들과 웃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었고 우울감에서 탈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 어두운 터널을 다 지나왔다. 오로지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험난한 길을…


하지만 희망은 늘 주변에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국가암정보센터의 치료비 지원과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 학생이지만 나중에 돈을 벌어서 엄마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딸이 유일한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이 딸을 위해서라도 꼭 내가 건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다.






국가 암정보센터 수기 공모 심사하시는 분들께..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제 사생활을 수기공모에서 다 털어 놨습니다.


아픔이 아직은 다가시지 않았는지 글을 쓰는 동안 내내 눈물이 나네요.


이렇게 제애기를 숨김없이 홀가분하게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 합니다.


 

공공누리/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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